꽃잎 돋으면 어쩌나. 가려워 어쩌나. 봄이 왔다고 산전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. 당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,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,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아나는데 어쩌나.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. 이 환한 초록 바다, 깊은 구멍 다 메꿔버리려네.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물, 쓰디쓴 파랑, 검은 떫음, 붉은 비린내, 입술 화한 노랑,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.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하려네.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들 앞에서,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.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. 꽃이 피면 어쩌나.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.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,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,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초록 벌판 어쩌나.
기도하라하네 쉬지 말고 기도하라하네 눈물로 간청하라하네 순종하라 언제나 순종하라 그러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서를 빌지 않고는 이 세상 넘어갈 수 없다하네 무릎꿇으라하네 벌레처럼 머리를 조아리라하네 두 손으로 싹싹 빌라하네 낮추고 낮추라하네 무릎을 꿇고 오줌발을 받으라하네 가슴을 치며 회개하라하네
열두 마리 새끼 밴 개 한 마리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네발로 땅 짚고 배를 맨땅에 부비며 새싹들을 뭉개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봄인지 겨울인지 비척비척 가려워 아 가려워
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래져서 한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하나 지나가네 뒤뚱뒤뚱 지나가네
김혜순(1955~ )